이집트 고대 왕조 중에서도 제10왕조는 비교적 알려지지 않은 시대입니다. 제9왕조에 이어 헤라클레오폴리스(Herakleopolis)를 기반으로 세력을 이어간 제10왕조는, 겉으로 보기엔 단순한 연장선처럼 보일 수 있지만, 당시 이집트 전체의 분열 상황과 정통성을 향한 경쟁을 고려하면 매우 중요한 시기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시기는 고왕국의 붕괴 이후 찾아온 제1중간기의 중심부로, 정치와 사회, 종교까지 모든 체제가 불안정했습니다. 제10왕조는 그 속에서 질서를 되찾고자 하는 야망과 정치적 생존 전략을 동시에 추구하며, 헤라클레오폴리스 왕조의 마지막 발악이자, 새로운 중왕국 시대를 준비하게 하는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제9왕조의 연장인가, 독립 왕조인가?
역사학자들 사이에서는 제10왕조를 바라보는 시각이 다양합니다. 제9왕조의 직접적인 후계 왕조로 보는 시각도 있지만, 일부 학자들은 제9왕조와는 다른 정치적 세력이 등장해 권력을 장악한 것으로 보기도 합니다. 기록이 불분명하고 사료가 부족한 탓에, 명확한 경계가 드러나지 않는 것이 특징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제10왕조가 여전히 헤라클레오폴리스를 정치 중심지로 삼았다는 점입니다. 이는 곧 하이집트 지역(이집트 북부)의 중심권력을 이어받은 형태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파라오들은 여전히 ‘이집트의 통치자’로서의 명분을 유지하려 했고, 일부는 케티(Khety)라는 이름을 계속 사용하며 정통성을 강화하려는 시도도 보입니다.
저는 이런 모습에서 ‘지속의 정치’를 느낍니다. 사회가 혼란스러울수록 사람들은 변화보다는 익숙한 명칭과 체계에 의존하게 됩니다. 제10왕조가 제9왕조의 전통을 계승한 듯한 인상을 주는 것도, 단순한 계보의 연장이 아닌 사회적 안정감을 위한 상징적 장치였던 것 같습니다.
테베 세력과의 대립, 내전의 격화
제10왕조가 가장 크게 마주한 문제는 상이집트를 기반으로 성장한 테베 세력과의 대립이었습니다. 테베는 이후 제11왕조로 발전하게 되는 세력으로, 아누르의 몬투(Montu) 신을 중심으로 세를 확장하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제10왕조가 주장하는 통치의 정당성을 인정하지 않았고, 남북으로 이집트가 사실상 양분된 상태였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군사적 충돌로 이어졌습니다. 양측은 반복적으로 국경을 넘나들며 전투를 벌였고, 그 과정에서 민중은 극심한 혼란과 피해를 겪었습니다. 일부 문헌에 따르면, 당시의 군사적 긴장은 일반 백성들 사이에서도 큰 불안을 야기했고, 치안 부재로 인한 사회 붕괴 현상도 곳곳에서 발생했다고 전해집니다.
저는 이 시기의 이집트를 ‘하나의 몸에 두 개의 심장이 뛰는 상태’로 비유하고 싶습니다. 북쪽과 남쪽, 각각의 권력이 자신이 진짜 중심이라 주장하며 움직이지만, 그 충돌이 오히려 전체 시스템의 피로와 붕괴를 가속화시키고 있었던 것이죠.
사회 구조의 변화와 귀족 계층의 부상
중앙 권력이 약화된 제10왕조 시기에는 지방 귀족과 관료 계층의 권한이 급격히 확대되었습니다. 파라오의 권위가 예전 같지 않았기에, 각 지역은 자치적으로 행정을 운영해야 했고, 귀족들은 군사력과 경제력까지 장악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당시 무덤 구조나 비석에 잘 나타납니다. 귀족들은 자신의 무덤에 파라오의 이름보다 자신의 업적과 권위를 더 크게 강조하기 시작했고, 자신을 ‘지역의 지배자’처럼 묘사하는 경우도 많아졌습니다. 이것은 곧 권력의 중심이 왕에서 지방으로 옮겨졌음을 상징합니다.
이 점에서 저는, 제10왕조는 왕조의 형태를 하고 있지만 실질적으로는 다핵화된 지방 분권 체제였다고 봅니다. 정치적 형식은 왕정이었지만, 실제 작동 방식은 거의 봉건제에 가까운 구조였던 셈이죠. 왕은 상징적 존재로 남았고, 실제 권력은 지역 단위에서 행사되는 시대였습니다.
종교적 정당성과 민중 통제의 시도
혼란한 정치 상황 속에서도 제10왕조는 종교를 통치의 수단으로 적극 활용했습니다. 특히 라(Ra)와 오시리스(Osiris) 숭배는 당시 파라오의 권위를 강화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라는 여전히 왕의 정통성을 대변하는 신이었고, 오시리스는 사후 세계의 질서를 상징하는 존재였기에, 민중에게 ‘질서 회복’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데 효과적이었습니다.
또한, 일부 파라오들은 사제 계층과의 동맹을 통해 지방 통제를 시도하기도 했습니다. 이는 단순한 종교 의식의 확대라기보다는, 민심을 안정시키고 정치적 기반을 확보하기 위한 현실적 선택이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이 시기의 종교 활용을 통해 고대 이집트가 권력과 신앙이 얼마나 밀접하게 맞물려 있는 체제였는지를 다시금 느끼게 됩니다. 단순한 통치 기술이 아닌, 신성성의 연출을 통한 정당성 확보는 고대든 현대든 통치의 중요한 요소라는 점에서 놀라운 통찰을 안겨줍니다.
결론: 황혼기, 그러나 의미 있는 저항
이집트 제10왕조는 결코 찬란하거나 화려한 왕조는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무너진 질서 위에서 새로운 체계를 만들기 위해 고군분투한 집단이었습니다. 그들은 약한 권력을 유지하며 대립과 혼란 속에서도 일정 부분 통합과 질서를 유지하려 했고, 결과적으로 중왕국 시대의 전환을 위한 다리 역할을 해냈습니다.
결국 이들은 테베 세력(제11왕조)의 부상과 통합에 의해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지만, 그들이 시도했던 정치적 전략과 사회적 조정은 이집트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저는 제10왕조를 ‘역사의 경계선에 선 왕조’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무너진 질서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새로운 시대의 가능성을 열어준 존재. 실패한 왕조가 아닌, 혼란 속에서도 역사적 책임을 감당한 최후의 파라오들이 바로 이들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