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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중간기의 서막, 이집트 제21왕조를 말하다

고고학자 알엔스 2025. 4. 30. 17:42

고대 이집트는 찬란한 문화와 오랜 역사를 지닌 문명입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람세스 2세나 투탕카멘 같은 인물들은 주로 신왕국 시기에 활약했던 파라오들이죠. 하지만 신왕국이 막을 내리고 찾아온 제3중간기(Third Intermediate Period)는 조금 다른 느낌으로 다가옵니다. 이 시기는 중앙 권력이 붕괴되고 이집트가 분열의 시대로 접어드는 시기로, 그 첫 단추를 끼운 왕조가 바로 제21왕조입니다. 오늘은 이 제21왕조를 중심으로 제3중간기의 시작과 그 의미에 대해 함께 이야기해보려 합니다.

이집트 제21왕조 관련 이미지
제3중간기의 서막, 이집트 제21왕조를 말하다

제21왕조의 배경: 권력은 나뉘고, 이집트는 흔들리다

제20왕조가 끝날 무렵, 이집트는 이미 내부적으로 큰 균열을 겪고 있었습니다. 람세스 11세의 말기에는 파라오의 권위가 크게 약화되었고, 실질적인 통치는 북부와 남부로 나뉘어 각기 다른 세력이 장악하게 됩니다. 북부에서는 **스멘디스(Smendes)**라는 인물이 새로운 왕조를 선포하고, 탄이스(Tanis)를 중심으로 정권을 세웠습니다. 그가 바로 제21왕조의 창시자입니다.

반면 남부 테베 지역에서는 아문 신전의 대제사장들이 실질적인 지배자로 떠오릅니다. 즉, 한 명의 파라오가 전체 이집트를 통치하는 시대는 막을 내리고, 종교 권력과 세속 권력이 나란히 병존하는 시대가 열린 것입니다.

이런 구조는 겉으로 보면 파라오 중심의 왕정이 유지되는 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지역 분권화가 심화되며 중앙집권체제는 사실상 붕괴되었습니다. 제21왕조는 북부만을 실질적으로 다스리는 왕조였고, 남부는 아문 제사장들이 자체적으로 운영하는 이중 권력 체계였습니다.

이러한 이원화된 정치 구조는 고대 이집트 역사에서 보기 드문 특징이며, 제3중간기의 가장 두드러진 시대적 흐름이기도 합니다. 개인적으로도 이런 정치적 구조가 만들어낸 갈등과 협력이 매우 흥미롭게 느껴졌습니다. 단순히 쇠퇴라고 단정짓기보다는, 기존과 다른 형태로의 ‘적응’이 아니었을까 생각하게 됩니다.

제21왕조의 통치와 특징: 실질 권력보다 외교와 제사 중심

스멘디스 이후에도 여러 파라오들이 제21왕조를 이끌었지만, 대부분은 강력한 정치력을 발휘하지 못했습니다. 실질적인 통치보다는 아문 신전과의 협조, 혹은 남부 신관세력과의 공존을 유지하는 데 초점을 맞췄습니다.

대표적인 파라오로는 **파수세네스 1세(Psusennes I)**가 있습니다. 그는 비교적 오랜 기간 동안 통치하며 북부 지역을 안정시켰고, 그의 무덤은 이후 발굴되어 놀라운 유물들을 남겼습니다. 특히 금관과 장신구들은 투탕카멘 무덤의 그것에 비견될 만큼 화려했지만, 시대적 관심도가 떨어진 탓에 대중적으로는 크게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또한 제21왕조는 외교적으로도 흥미로운 행보를 보입니다. 신왕국 시기처럼 대규모 정복 전쟁을 벌이지는 않았지만, 이스라엘 및 레반트 지역과의 교류를 통해 외교적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이를 통해 이집트의 문화가 여전히 중동 지역과 연관되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경제적으로는 어려움이 따랐습니다. 왕실의 권위는 약해졌고, 무역도 신왕국만큼 활발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왕들은 신전과의 관계를 강화하며 종교적 정당성을 기반으로 통치하려 했습니다. 이는 파라오가 단순한 왕이 아니라 신의 대리자로서 그 존재 의미를 다시 상기시키려 했던 전략이기도 합니다.

저는 이러한 행보가 오히려 ‘생존 전략’처럼 느껴졌습니다. 강력한 군사력이나 재정이 부족한 상황에서 선택할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방식이었을 것입니다. 왕조가 약해지는 와중에도 문화를 유지하고 외교를 지속하려는 노력이 엿보여, 단순한 쇠퇴기가 아니라 변화기라는 생각이 더 크게 들었습니다.

남부 아문 제사장들의 실세화와 이집트의 분열

앞서 언급한 것처럼, 제21왕조 시기에는 테베 지역에서 아문 신전의 제사장들이 왕 못지않은 권력을 행사했습니다. 특히 **헤리호르(Herihor)**나 피안치(Pinedjem) 같은 인물들은 이름은 제사장이었지만, 실제로는 남부 이집트의 통치자 역할을 했습니다. 이들은 스스로 파라오의 형식을 빌려 신전에서 제례를 주관하고, 장례 의식을 집행하며 ‘왕처럼’ 행세했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이들 제사장이 정통 파라오 계보와는 별도로 스스로 무덤을 만들고, 자신들의 위상을 후세에 남기려 했다는 점입니다. 왕실 무덤처럼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그들 역시 자신의 정당성을 신과의 연결에서 찾았다는 것이 인상적입니다.

제21왕조가 북부를 통치하고, 아문 제사장들이 남부를 장악하는 이 이중 체제는 일시적인 구도가 아니라 거의 130년간 지속되었습니다. 그리고 이후 제22왕조에 이르러 리비아계 통치자들이 등장하며 새로운 갈등 구조로 전환되게 됩니다.

이 시기를 돌아보면, 단순히 '혼란기'라고 표현하기엔 아까운 측면이 많습니다. 분명 권력이 약화되고 도굴, 외적 침입 같은 문제가 있었지만, 그 안에서도 이집트인들은 질서를 유지하려는 다양한 노력을 이어갔습니다. 종교, 문화, 외교를 통한 복잡한 조율이 이루어진 점에서, 저는 제21왕조를 ‘변화의 실험기’라 부르고 싶습니다.

결론: 혼란 속에서도 꺼지지 않았던 고대 이집트의 불씨

제21왕조는 명확한 쇠퇴와 분열의 시기였지만, 그 안에는 새로운 방식의 통치와 권력 조율이 존재했습니다. 파라오의 권위가 약해졌음에도 불구하고, 이집트라는 고대 문명은 제사와 외교, 문화라는 축을 중심으로 질서를 유지하려 했습니다. 개인적으로 제21왕조를 공부하면서 느낀 것은, 고대인들도 끊임없이 변화하는 시대 속에서 균형점을 찾으려 노력했다는 점입니다.

이러한 시기를 단순히 ‘중간기’라 명명하는 것보다, 과도기 혹은 전환기의 가치로 바라보는 시선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고대 이집트의 역사는 화려함뿐 아니라 이런 내면적 진통의 시기를 통해 더욱 풍성해졌음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