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이집트사에서 대중적으로 잘 알려진 왕조는 람세스 2세가 속한 제19왕조나 투탕카멘이 소속된 제18왕조 같은 신왕국 시대의 찬란한 시기일 것입니다. 하지만 정치적 혼란과 외세 간섭으로 점철된 후기 왕조 시대도 이집트사의 중요한 일면을 보여줍니다. 그중에서도 기원전 8세기 중후반, 제24왕조는 매우 독특한 입지에서 이집트의 명맥을 이어가려 했던 왕조입니다. 누비아계 제25왕조의 부상과 리비아계 세력의 잔존 사이에서 제24왕조가 취했던 전략은 정치 생존과 외교술의 미묘한 균형을 잘 보여줍니다.
제24왕조는 어떻게 탄생했으며, 왜 독립적으로 존재했는가?
제24왕조는 상대적으로 짧은 시간(약 10년 내외) 동안만 존속한 소왕조이지만, 이 시기의 복잡한 국제 정세 속에서 나름의 생존 전략을 구사했습니다. 이들은 전통적인 테베 중심의 상이집트가 아닌, 서쪽 삼각주 지역인 사이스(Sais)를 중심으로 한 독립적 정치 실체로 나타났습니다. 당시 이집트는 중앙의 구심점이 약화되면서 지역 세력들의 분열과 통합이 반복되는 과도기적 시기에 놓여 있었습니다.
누비아 세력의 부상과 제24왕조의 대응
기원전 8세기 후반, 이집트 남쪽 누비아 지역(오늘날 수단 북부)에서 강력한 왕조가 부상했습니다. 바로 제25왕조, 혹은 쿠시 왕조라고 불리는 세력입니다. 이들은 선왕 카슈타를 시작으로 본격적인 이집트 북진 정책을 추진했으며, 피안키(Piye) 왕의 경우 군사 원정을 통해 멤피스를 비롯한 하이집트 지역을 장악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이집트 내 북부 지역, 특히 서부 삼각주의 사이스와 그 주변은 피안키의 영향력에서 벗어난 채 부분적인 자치 혹은 독립을 유지하려는 움직임을 보였습니다. 이 중심에 있었던 인물이 바로 타페넥티(Tefnakht)입니다. 그는 스스로를 ‘하이집트의 군주’라고 칭하며, 사실상 사이스를 기반으로 독립된 정치 세력을 구축했습니다. 이후 그를 중심으로 형성된 왕조가 바로 제24왕조입니다.
타페넥티는 군사력보다는 외교적 연합과 결속을 통한 방어 전략을 주로 사용했습니다. 피안키의 침공에 맞서 나일 델타 지역의 여러 지방 군주들을 규합하려 했으며, 실제로 일시적인 반(反)누비아 연합을 이끌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피안키의 압도적인 군사력 앞에 결국 패배했고, 복속 의사를 밝히며 정치적 생존을 꾀했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피안키가 타페넥티를 즉각 폐위하거나 제거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는 누비아 왕조가 정치적 융합과 상징적 통합을 중시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며, 제24왕조 또한 이를 기회로 정치적 생명력을 연장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리비아계 세력과의 경쟁과 협력
제24왕조의 배경에는 리비아계 잔존 세력과의 관계도 놓여 있습니다. 제22~23왕조는 리비아계(버브르족) 출신 지도자들이 이집트를 통치하던 시기로, 이 시기 삼각주 지역에는 리비아계 유산이 깊이 남아 있었습니다. 타페넥티 역시 리비아계 혼혈로 보는 견해가 많으며, 그가 삼각주 북서부의 사이스를 기반으로 삼은 점에서도 이러한 문화적 연결이 확인됩니다.
하지만 문제는 단순한 계통이나 민족적 정체성보다, 지역 패권을 두고 벌이는 복잡한 정치 역학이었습니다. 같은 리비아계 출신이라도 제22~23왕조의 후계자들과 사이스 세력 간에는 이해관계가 엇갈렸습니다. 타페넥티는 자신의 독립성과 정통성을 강화하기 위해 누비아 왕조에 맞서는 동시에, 삼각주 내 기존 리비아계 제후들을 견제하거나 포섭하려는 이중 전략을 사용했습니다.
이는 당시 이집트 북부가 단일한 지배 구조가 아닌, 복수의 왕들이 존재하는 다중 왕권 시대였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타페넥티는 누비아 왕 피안키에게 복속을 표하긴 했지만, 여전히 사이스 지역의 통치자로서 사실상의 자치를 유지했습니다. 특히 그는 사이스의 방어 체계를 정비하고, 상징적 건축물들을 세움으로써 왕조의 위상을 외적으로 드러내는 데 주력했습니다.
전략적 계승자: 바크엔레네프(Bakenranef)와 이집트의 미래
타페넥티 사후, 제24왕조를 계승한 인물은 그의 아들로 알려진 바크엔레네프(Bakenranef)였습니다. 그는 그리스 역사가 마네토와 디오도로스가 높이 평가할 정도로 개혁적인 성향을 가진 통치자로 묘사됩니다. 특히 법률 개정과 경제 제도의 정비 등 사회 구조 개선을 시도한 개혁가 왕으로 기록되었는데, 이는 매우 이례적인 평가입니다.
하지만 제24왕조의 생존은 여기서 끝이 납니다. 누비아의 제25왕조가 본격적으로 이집트 전역을 통합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결국 바크엔레네프는 사로잡혀 화형을 당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이 장면은 당시의 정치 통합이 결코 평화적인 통합만은 아니었음을 잘 보여줍니다.
비록 제24왕조는 짧은 기간에 사라졌지만, 그들의 생존 전략과 유산은 이후 사이스 왕조(제26왕조)의 출현에 결정적인 기초를 마련합니다. 사이스는 다시금 이집트를 통일하고, '이집트 르네상스'라 불리는 시기를 열게 됩니다. 바크엔레네프의 개혁적 성향과 행정 시스템 정비 노력은 이후 사이스계 왕조가 안정적으로 출발할 수 있었던 기반이 되었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미가 큽니다.
결론: 짧지만 치열했던 제24왕조의 생존 전략
고대 이집트의 후기 왕조 시기는 혼란과 분열의 역사로 기록되지만, 그 속에서 각 지역 왕조들이 보여준 정치적 유연성과 전략적 판단은 현대 정치사에서도 시사점을 줄 수 있습니다. 제24왕조는 그 대표적 사례입니다. 비록 강력한 무력이나 중앙 권력을 확보하지는 못했지만, 누비아와 리비아 사이에서 살아남기 위해 외교적, 상징적, 제도적 전략을 병행하며 마지막까지 존재감을 드러냈던 소왕조였습니다.
개인적으로도 제24왕조의 사례는 우리가 불안정한 시대를 살아갈 때 어떤 방식으로 균형을 찾고, 미래를 위한 기반을 다질 수 있을지를 고민하게 합니다. 크지 않은 세력도 전략과 정체성이 있다면 역사 속에서 무시할 수 없는 족적을 남길 수 있다는 사실, 그것이 제24왕조가 우리에게 남긴 가장 큰 메시지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