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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라오 없는 나라: 로마 제국령 이집트의 역사

고고학자 알엔스 2025. 5. 11. 22:52

수천 년에 걸쳐 이어진 파라오들의 나라, 이집트는 고대 세계에서 독보적인 위상을 가진 문명이었습니다. 그러나 기원전 30년, 클레오파트라 7세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죽음으로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막을 내리게 되었고, 이집트는 더 이상 독립된 왕국이 아니게 됩니다. 이후 이 땅은 로마 제국의 직할령으로 편입되며, 파라오 없는 이집트, 다시 말해 자기 손으로 나라를 다스릴 수 없는 시대가 시작됩니다.

오늘은 이집트가 로마 제국의 일부가 된 이후의 역사를 살펴보며, 고대 문명과 제국 체제 사이의 충돌과 공존, 그리고 이집트의 정체성이 어떤 방식으로 변화해 갔는지를 함께 탐구해보고자 합니다.

로마 제국령 이집트 관련 이미지
파라오 없는 나라: 로마 제국령 이집트의 역사


로마의 속주가 된 이집트, 특별한 식민지

기원전 30년, 옥타비아누스(훗날 아우구스투스)는 악티움 해전에서 승리한 뒤 알렉산드리아를 함락하고, 이집트를 로마 제국의 속주로 편입시킵니다. 그러나 이집트는 단순한 속주가 아니었습니다. 옥타비아누스는 이집트를 ‘황제의 개인 영지’로 선언하여 원로원의 통제에서 제외된 특별한 식민지로 관리했습니다.

이는 이집트가 가진 전략적·경제적 가치 때문이었습니다. 나일강의 곡창 지대는 로마로 가는 주요 곡물 공급원이었고, 지중해와 동방을 연결하는 지정학적 위치는 제국 전체의 균형에 영향을 줄 수 있을 만큼 중요했습니다. 그래서 로마 황제들은 이집트를 직접 다스리며, 그 어떤 속주보다 엄격하게 통제했습니다.

저는 이 대목에서 로마가 이집트를 ‘속주’라기보다는 ‘전략 자산’처럼 다뤘다고 느꼈습니다. 그만큼 이집트는 단순한 정복지 이상의 의미를 지닌 땅이었고, 황제 개인이 특별 관리하는 것이 오히려 정권 유지에 유리하다고 판단했을 것입니다.


파라오의 흔적을 지운 통치, 그러나 신전은 남다

로마는 이집트에 들어서자마자 기존의 왕권 체계와 파라오의 정치적 역할을 완전히 철폐합니다. 황제가 곧 통치자이며, 지방 총독(Praefectus Aegypti)은 로마 시민이 아닌 기사 계급 출신으로 임명되어 황제를 대신해 이집트를 다스렸습니다. 이는 로마 제국 속주 중 이집트만의 독특한 특징이었습니다.

정치적으로 파라오가 사라졌다고는 하나, 이집트의 종교와 신전 문화는 한동안 유지되었습니다. 로마 황제들은 초기에는 종교적 저항을 최소화하기 위해 이집트 전통 신전의 후원자 역할을 자처하기도 했습니다. 일부 황제는 아문 신이나 이시스 여신에게 제를 올리고, 이집트식 의복을 입은 조각상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점차 시간이 지나면서 헬레니즘적 신앙과 로마의 황제숭배 문화가 이집트를 잠식해 나갑니다. 신전은 점차 쇠퇴하고, 이집트 고유의 상형문자 사용도 점점 줄어들며, 결국 로마 후기에는 거의 사라지게 됩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이 시기를 ‘느린 종말’이라 표현하고 싶습니다. 정치적 지배는 갑작스럽게 바뀌었지만, 문화와 종교는 점진적으로, 그러나 확실하게 사라져갔기 때문입니다. 이집트는 로마 제국 안에서 점점 더 과거의 나라가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경제적 역할과 사회의 변화

로마 제국령 이집트는 제국 전체를 먹여 살리는 곡물 창고로 불릴 만큼, 농업 생산력이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나일강의 주기적인 범람은 여전히 비옥한 땅을 만들어냈고, 그 수확물은 로마 시민들의 빵이 되어 공급되었습니다. 특히 알렉산드리아는 상업과 학문, 행정의 중심지로 기능하며, 로마 동부에서 가장 중요한 도시 중 하나로 성장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경제적 번영 속에서도 현지 이집트인들의 삶은 점점 고립되고 단절되기 시작합니다. 로마는 그리스계-로마계 엘리트들을 행정계층에 우선 배치했고, 토착 이집트인은 종종 하위 계층으로 밀려나게 됩니다. 심지어 세금 부담도 이들에게 더 무겁게 지워졌습니다.

알렉산드리아는 종종 폭동과 유혈 사태의 중심지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리스인, 유대인, 이집트인 사이의 갈등은 로마 당국의 개입으로 일시적으로 진정되었지만, 이집트 사회 내부의 이질감은 점점 커졌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문화적 융합이 꼭 긍정적 방향으로만 작용하지 않음을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저는 이집트가 로마의 일부가 되었을 때, 겉으로는 평화로워 보였지만 정체성과 권력의 비대칭 구조가 사회 전반에 깊게 뿌리내렸다는 점을 중요하게 봅니다.


종교의 전환, 파라오의 시대를 지우다

로마 제국령 시기의 후반부로 갈수록 가장 큰 변화는 바로 종교의 전환입니다. 1세기 말부터 기독교가 퍼지기 시작했고, 3세기 후반 이후 로마 황제들이 기독교를 인정하면서 이집트 내 기존 신앙은 급격히 위축됩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 이후에는 기독교가 제국의 공인 종교로 채택되면서, 이집트의 전통 신전들은 파괴되거나 방치됩니다.

특히 필라에 섬(Philae)의 이시스 신전은 마지막까지 제의를 유지하던 장소였으나, 6세기 초에 폐쇄되며 고대 이집트 종교는 공식적으로 역사에서 사라지게 됩니다. 이것은 곧, 이집트 문명의 정신적 핵심이 완전히 무너졌음을 뜻하는 사건이었습니다.

또한 이 시기, 이집트에서 마지막 상형문자가 쓰인 기록이 등장합니다. 기원후 394년, 필라에 섬의 한 사제가 남긴 비문이 공식적인 상형문자의 종결점으로 여겨지며, 이로써 이집트인의 고유 문자·언어·종교가 모두 사라지게 됩니다.

저는 이 장면에서 고대 문명이 지닌 정신적 기반이 사라지는 것의 의미를 생각하게 됩니다. 문화란 눈에 보이는 건축물이나 유물만이 아니라, 사람들이 믿고 실천하는 이야기와 언어, 신념이라는 사실을 다시금 깨닫게 됩니다.


마무리하며: 파라오 없는 이집트, 그러나 살아 있는 역사

로마 제국령 이집트는 분명 파라오가 없는 나라였습니다. 하지만 이 시기는 단지 통치자의 부재가 아니라, 정체성의 해체와 재조립의 시기였습니다. 이집트는 로마의 일부로 편입되었고, 정치적으로 종속되었지만, 그 안에서 문명이 사라지고 다시 태어나는 과정을 겪었습니다.

나는 이 시기를 ‘끝’이라기보다는 또 다른 이집트의 시작으로 보고 싶습니다. 파라오의 시대는 끝났지만, 이집트라는 장소와 문화는 로마 안에서 새로운 형태로 살아남았고, 훗날 기독교 이집트, 이슬람 이집트로 이어지는 긴 역사의 토대를 마련하게 됩니다.

우리는 이집트의 역사를 이야기할 때 종종 파라오와 피라미드만 떠올리곤 합니다. 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수천 년의 변화 속에서도 이 땅이 문화의 중심지로 살아남았다는 점입니다. 로마의 지배 아래 있었던 시기조차도, 이집트는 단지 침묵하지 않았고, 새로운 정체성을 모색하며 계속 변화해 나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