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로마 역사에서 가장 드라마틱한 시기를 꼽는다면, 공화정의 종말과 제정의 시작을 담고 있는 시기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 그 중심에 있었던 인물이 바로 옥타비아누스(Octavian), 훗날 아우구스투스(Augustus)로 불리게 되는 인물입니다. 그는 단순한 로마의 첫 번째 황제를 넘어, 로마라는 국가의 정치적 방향을 근본적으로 바꾼 설계자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처음부터 ‘황제’였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양자로 선택된 젊은 귀족 청년이 피로 물든 권력의 계단을 올라, 최종적으로 ‘존엄한 자’로 불리기까지, 그의 여정은 매우 조심스럽고 치밀했으며, 당시 로마의 불안정한 정치 상황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었습니다.
이 글에서는 옥타비아누스가 어떻게 아우구스투스가 되었는지, 그 과정 속에서 어떤 전략과 판단을 했는지, 그리고 그가 남긴 유산은 무엇이었는지를 차분히 되짚어 보려고 합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양자로서 등장하다
옥타비아누스는 기원전 63년, 비교적 덜 알려진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인생이 급변하게 된 계기는 기원전 44년, 카이사르가 브루투스와 카시우스 등에게 암살당하고 난 직후였습니다. 카이사르는 유언장을 통해 옥타비아누스를 자신의 양자이자 상속인으로 지명했으며, 이로 인해 그는 갑자기 로마 정치의 중심에 서게 됩니다.
당시 로마는 내전의 불씨가 활활 타오르고 있었습니다. 카이사르를 지지하던 진영과, 공화정을 수호하려던 세력 간의 갈등이 격화되고 있었으며, 옥타비아누스는 그 한가운데서 어떻게 움직일지를 고민해야 했습니다.
그는 젊고 경험이 부족했지만, 놀라운 정치적 감각과 설득력을 통해 카이사르의 지지 기반을 끌어들이는 데 성공합니다. 특히 베테랑 장군들이나 민중의 신뢰를 잃지 않으면서도, 정적들과는 일시적으로 손을 잡는 유연함도 보여주었습니다.
저는 이 시기의 옥타비아누스를 보면서, 단순히 정치권에 밀려 들어간 인물이 아닌, 변화를 읽고 조정할 줄 아는 ‘정치적 학습자’였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전면에 나서지 않으면서도 영향력을 점차 키워나갔습니다.
삼두정치와 권력의 분할, 그리고 갈등
기원전 43년, 옥타비아누스는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레피두스와 함께 제2차 삼두정치 체제를 구성합니다. 이는 카이사르의 원수를 갚는다는 명분으로 시작되었으며, 브루투스와 카시우스를 제거한 뒤, 로마는 잠시 평화를 찾는 듯 보였습니다.
하지만 삼두정치는 오래 지속되지 못했습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 간의 긴장감은 점점 더 커졌고, 결국 두 사람은 로마의 통치권을 두고 경쟁하는 구조로 재편됩니다.
안토니우스는 동방 원정과 클레오파트라와의 동맹으로 점차 로마의 전통적 가치에서 멀어졌다는 비판을 받았고, 옥타비아누스는 스스로를 로마의 수호자이자 ‘정통성 있는 지도자’로 포지셔닝하며 민심을 얻어갔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기원전 31년, 악티움 해전이 벌어지며 두 인물 간의 갈등은 전면전으로 번집니다. 이 전투에서 옥타비아누스가 승리하며 사실상 로마의 유일한 실권자로 등극하게 됩니다.
저는 이 시기의 옥타비아누스를 보면, 그가 정치적 수 싸움뿐 아니라 이미지 전략에서도 능했던 인물이라는 점을 실감하게 됩니다. 그는 단순한 군사 승리가 아니라, 시민들의 마음을 얻는 방향으로 철저히 계산된 메시지를 전달할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아우구스투스라는 이름, 황제가 아닌 황제
옥타비아누스는 악티움 해전 승리 이후에도, 황제라는 직함을 곧장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기원전 27년, 그는 원로원으로부터 ‘아우구스투스(Augustus)’라는 칭호를 수여받습니다. 이 명칭은 ‘존엄한 자’라는 의미로, 단순한 통치자 이상으로 신성성과 권위를 내포한 호칭이었습니다.
겉으로는 공화정이 유지되고 있었고, 그는 스스로를 ‘프린켑스(제1시민)’이라 불렀습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군사, 외교, 재정, 행정 전반에 걸쳐 절대적인 권력을 행사하였습니다. 그는 ‘나는 황제가 아니다’라고 말하면서도, 모든 실권을 틀어쥐는 방식으로 로마 제정의 기반을 조용히 완성했습니다.
이 부분에서 저는 아우구스투스의 진짜 위대함이 드러난다고 봅니다. 그는 말로는 공화정을 존중한다고 했지만, 실질적으로는 새로운 정치 질서를 만들어낸 인물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폭력이나 법률 개정이 아닌, 시간과 설득, 그리고 정치적 안정을 통해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더욱 인상 깊습니다.
체제를 다지고 문화를 꽃피우다
아우구스투스는 권력을 잡은 뒤에도 로마를 더 강하게 만들기 위해 다양한 정책을 펼칩니다. 군제 개혁, 세금 제도 정비, 도로망 확충, 국경 안정 등 실질적인 행정 능력을 발휘하였으며, 로마의 확장을 전략적으로 조율했습니다.
또한 그는 문화 예술의 후원자이기도 했습니다. 그의 시대에는 베르길리우스, 호라티우스, 리비우스 같은 걸출한 문인들이 활동하면서 ‘아우구스투스 시대’라는 고전 문화의 황금기를 열게 됩니다.
그는 종교적으로도 고대 로마의 전통을 되살리고, 자신의 통치를 신들의 질서 안에 있는 신성한 통치로 정당화하려는 시도를 이어갔습니다. 파르테논 신전의 재건, 제사장의 직함을 직접 맡는 모습 등에서 정치와 종교를 통합하려는 통치 철학이 드러났습니다.
마무리하며: 공화정에서 제정으로, 한 사람의 여정
‘옥타비아누스에서 아우구스투스까지’의 여정은 단지 한 인물의 출세가 아니라, 로마라는 나라의 체제가 완전히 바뀌는 과정이었습니다. 이 여정을 통해 우리는 공화정의 한계와 제정의 필요성, 그리고 이를 실현해낸 지도자의 리더십을 엿볼 수 있습니다.
아우구스투스는 스스로를 황제라 부르지 않았지만, 그 누구보다 황제다운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칼보다 제도를, 전쟁보다 안정된 설계를 추구했으며, 로마가 오랫동안 누릴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어냈습니다.
저는 그를 통해 ‘진짜 리더는 시대를 다스리는 사람이 아니라, 다음 시대를 준비하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다시금 느끼게 됩니다. 옥타비아누스가 아우구스투스가 되는 과정은, 역사의 궤도를 바꾼 단 하나의 인물이 남긴 가장 위대한 설계도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